혁신이라는 단어 뒤에는 언제나 고독한 외침이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대중은 ‘지금의 문제’에 집중하고, 소수만이 ‘내일의 가능성’을 본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 모두가 "그건 안 돼"라고 말할 때, 누군가는 "그래도 해볼게"라고 버틴다.
그 고집이 때론 ‘끈기’로 불리고, 때론 ‘아집’이라 비난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끈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실패하면 아집이고, 성공하면 끈기라는 말로 포장되는 말은 조금 무책임해보이기도 합니다.
시장을 이기려들지 마라라는 말도 있지만, 소비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른다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중요한건 어떠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그때까지 밀어붙여서 검증해보려는 자세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야 후회라도 남지 않을테니까요
브라이언 체스키와 조 게비아는 샌프란시스코의 방세가 밀려, 집 거실에 에어 매트리스를 깔아 낯선 사람에게 빌려주기 시작했다.
이름도 "AirBed & Breakfast". 이들의 아이디어는 명백히 이상했다. “남의 집에 돈 주고 잘 사람이 어디 있어?” 투자자들은 고개를 저었고, 서비스는 한참을 버벅거렸다.
심지어 서비스가 너무 안 돼서, 직접 유저들을 찾아다니며 시리얼 박스를 팔아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오바마 시리얼, 맥케인 시리얼 같은 거였다. 진짜다.)
그 시절, 체스키는 뉴욕에 있는 사용자 집에 하나하나 찾아가 ‘왜 안 쓰는지’ 물었다. 그는 그 말을 메모하고, 당일에 수정을 하고, 또 물으러 갔다.
이런 짓을 몇 주 동안 반복한 결과, 드디어 서비스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유저가 느는 속도는 느렸지만, 사용자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결국 2009년 Y Combinator에 선정되었고, 본격적인 투자 유치와 글로벌 확장이 이어졌다.
이 아이디어가 성공하기까지는 수많은 거절과 조롱, 그리고 “집요한 실사용자 집착”이 필요했다.
Airbnb의 성공은 ‘기묘하지만 인간적인 아이디어’가 결국 현실을 바꾸는 방식에 대한 교과서 같은 예시다.
제임스 다이슨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 많은 공돌이였다.
1978년, 그는 진공청소기를 밀다가 한 가지 불만을 느꼈다. “왜 흡입력이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지?”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참고 쓰지만, 그는 이 문제에 집착했다.
공기 흐름, 회전력, 먼지 제거 구조까지 분석하며 무려 5,127개의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무려 15년이 걸렸다.
돈도 다 떨어지고, 가족도 지쳐갔다. 회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냥 있는 거 쓰세요. 이건 시장성이 없어요.”
하지만 다이슨은 자신만의 싸이클론 기술을 끝까지 밀었다. “기계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 말이 그의 철학이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회사를 차려 첫 제품을 출시했고, 영국에서는 미친 듯이 팔려 나갔다.
지금 다이슨은 프리미엄 청소기, 헤어드라이어, 심지어 공기청정기 시장의 왕이다. 기존의 것을 의심하는 고집이 만든 승리였다.
슬랙은 본래 성공한 사업이 아니었다.
그 출발은 ‘Glitch’라는 게임이었다. 2011년,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고 재밌는 MMO 게임을 만들었지만, 유저들은 그 게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몇 년 뒤 결국 서비스를 접었다. 많은 스타트업이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창업자 스튜어트 버터필드는 달랐다.
그는 “우리 팀이 협업할 때 썼던 내부 메신저가 꽤 괜찮았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그 메신저는 단순하지만 빠르고, 기록도 잘 남고, 검색도 되었다. 무엇보다 ‘이메일 없이 협업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걸 외부에 공개했더니,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깜짝 놀랐다. “어? 이거 이메일보다 낫네.” 슬랙은 기능 하나하나에 집요하게 개선을 더하며 팀워크 툴로 자리를 잡았다.
몇 년 뒤, 수십억 달러에 세일즈포스에 인수된다. 망한 게임이 던진 실패의 잔해 속에서, 슬랙이라는 보석이 태어났다.
2012년, 딜런 필드와 에반 월리스는 브라우저에서 디자인을 실시간으로 하는 툴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 당시 디자이너들은 포토샵, 스케치 등 무겁고 정교한 데스크탑 프로그램에 익숙했다. “웹에서 디자인? 그림판이야 뭐야?” 조롱이 쏟아졌다.
그러나 딜런은 믿었다. “팀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면,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느낄 거야.”
4년 동안 베타 테스트와 개선을 반복하며 거의 묻혀 있었다. 그리고 2016년, 드디어 정식 출시. 유저 수는 느렸지만, 점점 입소문이 났다.
구글 독스를 쓰듯 협업할 수 있는 디자인 툴이라는 점이 먹혔다.
팬데믹 이후 원격 협업 시대가 오자, Figma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결국 어도비는 이 회사를 무려 200억 달러에 인수하려 한다. 그토록 무시당하던 웹 디자인툴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처음엔 우편으로 DVD를 빌려주는 서비스였다.
1997년 넷플릭스는 비디오 가게가 불편하다는 생각 하나로 출발했다. 이용자들은 반신반의했다.
“우편으로 영화를 빌린다고?” 투자자들은 비웃었다. 2000년, 창업자는 블록버스터에 회사를 팔겠다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집요하게 추천 알고리즘을 개선하고, 사용자 경험을 최적화했다.
점점 사람들이 익숙해지자,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아도 볼 영화를 추천해주는 서비스가 됐다. 그리고, 스트리밍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결정은 당시로선 무모했다. 인터넷 속도, 서버 문제, 라이선스 비용 등 장애가 많았다.
하지만 이 고집이 결국 기존 TV 시장 전체를 흔들었다. 이제 넷플릭스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미디어 왕국이 되었고, 블록버스터는 사라졌다.
사라 블레이클리는 세일즈 전화기를 팔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스타킹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직접 잘라 입었다.
그리고 이걸 사업 아이디어로 바꿨다. 주변 반응은 이랬다. “그걸 누가 사?” “그냥 스타킹 사 입지.”
하지만 그녀는 수십 개 공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초기 자금도, 마케팅도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홈쇼핑에 출연했는데, 그 방송에서 8분 만에 완판됐다. 여성들의 숨겨진 니즈를 건드린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전통적인 속옷 회사들과 다른 방식으로 브랜딩을 이어갔다.
실용성과 현실성을 강조했고, 고객 피드백을 전 제품에 반영했다.
이제 Spanx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고, 사라는 자수성가 여성 억만장자 1호가 됐다.
멜라니 퍼킨스는 호주에서 교사로 일하며, 학생들이 포토샵을 배우느라 고생하는 걸 보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디자인을 쉽게 만들 수 있으면 어떨까?” 그녀는 기술도 없고 개발자도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온라인 연감 제작 툴’을 먼저 만들었다.
몇 년간 이 작은 툴을 돌리며 사용자의 반응을 살폈고, 그 사이 파트너를 찾아 Canva라는 툴로 확장했다.
VC들은 계속 거절했다. “포토샵이 있는데 왜 이걸 써?” “너무 단순하다.” 그러나 그녀는 지치지 않았다. 200번 넘게 투자 거절을 당하면서도, 계속 피칭했다.
결국 실리콘밸리에서 한 엔젤 투자자를 만나 기회를 얻는다.
Canva는 출시 이후 ‘누구나 디자인할 수 있다’는 모토로 입소문을 타며 급성장했다. 지금 Canva는 전 세계 1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툴이다.
퍼킨스는 지금, 수십억 달러 가치를 지닌 최연소 여성 CEO가 되었다.
잭 콘테는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이었다.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수익은 형편없었다.
“도대체 왜 이럴까?” 그는 팬들에게 직접 창작자에게 돈을 내는 방식을 상상한다. 매달 1달러, 5달러씩 정기 구독하듯 후원하는 플랫폼.
이 생각을 들은 사람들은 반응했다. “미쳤냐?” “그건 기부야.” “수익화가 되겠냐?”
하지만 잭은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지인 몇 명과 시작했다. 창작자들은 열광했다. “와, 이걸로 생활이 가능하네!”
Patreon은 창작자의 독립성을 보장하면서도, 팬들과의 연결을 끈끈하게 만든 새로운 모델이었다.
지금은 유튜버,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등 수십만 명의 창작자가 Patreon을 통해 생계를 꾸린다.
‘예술가가 굶는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누군가는 그 첫 삽을 들어야 했다.
노션은 2013년에 시작됐다. 그 전에도 수많은 생산성 앱들이 있었고, 대부분 흐지부지 사라졌다.
“노트앱? 또 하나 추가된 거네.” “에버노트도 못 뜨는데 뭘 기대해?” 이런 반응 속에서 노션 팀은 무려 3년간 거의 아무런 마케팅도 없이 제품 개발에만 매달린다.
그들은 텍스트, 데이터베이스, 캘린더 등 모든 걸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UI를 만들고자 했다.
거의 ‘레고 블록처럼’ 쌓을 수 있는 개념이었다. 이게 바로 차별점이었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느리지만 강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개발자, 디자이너, 작가들이 먼저 열광했고, 이후 입소문으로 퍼졌다.
지금은 팀 협업 도구, 위키, 개인 노트앱 등 올인원 지식 관리 툴의 대표주자가 됐다. “마이너스부터 시작한 집요한 제품주의”가 낳은 승리였다.
루이스 폰 안은 CAPTCHA를 만든 천재 교수였다.
그는 교육의 불평등을 보며, 누구나 무료로 언어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품었다.
문제는, 대부분 언어 교육 앱이 무료로 운영될 수 없다는 점. “무료면 쓰레기겠네.” 사람들은 냉소적이었다.
그는 게임 요소를 넣고, 점수 시스템, 알림 기능, 캐릭터까지 개발했다.
언어 학습을 게임처럼 중독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무료로 풀었다. “돈은 나중에 생각하자.”
유저들은 점점 Duolingo의 시스템에 빠져들었고, 자발적으로 학습을 이어갔다.
지금은 50개 이상의 언어를 제공하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언어학습 앱이 되었다.
‘돈 안 되는 일’이라 불리던 교육이, 지금은 세계적인 비즈니스가 되었다. 모든 건 “당장 수익보다, 당장 필요한 가치”를 우선시한 결과였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모두 처음에는 비웃음과 무시를 당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비웃음을 무릅쓰고 계속 나아간 원동력은 ‘고집’이었다.
누군가의 고집은 쉽게 “말 안 듣는 성격”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엔 세상을 바꾸는 끈기이 된다.
끈기와 아집의 경계는 모호하다.
결과가 없으면 아집이고, 성공하면 끈기로 불린다. 하지만 모든 혁신은 이 경계의 틈에서 시작된다